2012 이근욱 세계외교사 : 1회차 (빈 회의 – 근대 유럽 외교사의 시작)
SOGANG OCW
ocw.sogang.ac.kr
위 링크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필기라기 보다는 메모에 가깝기에 단순 참고용이다*
중간에 나무위키 링크가 있다면 이건 그냥 혼자 읽어보려고 넣은 것이지 강의와 관련없다...
비엔나 회의(1814-1815) 이전
현재의 국제정치정세 : 주권평등, 국가 상위의 단위체는 존재하지 않음 – 국제적 무정부상태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싹튼 지 길어봐야 150년정도밖에 안됨.
중국은 천자가 다스리는 국가 조선은 왕이 다스리는 국가 – 주권의 차등이 존재했다
유럽에서는 400년 정도 됨
– 황제의 국가, 국왕의 국가, 공국(principality)이 서열에 따라 차등하게 존재함.
독립된 형태의 도시국가, 교황청 등이 존재함.
중세 유럽의 질서는 이른바 제국질서였고, 신성로마제국(약 800,900 - 1806)이 존재했다.
모든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는 보편적 종교로써의 카톨릭.
Catholic is katholic (천주교는 보편적이다)
1517년 95개조 반박문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질서가 깨지게 되었다.
즉, 개신교, protestant 신교가 나오면서 가톨릭의 보편적 성격은 상실된다
이후 여러 번에 걸친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1618- 1648년간의 30년 전쟁이 최후의 종교 전쟁 – 이 때 등장한 것이 베스트팔렌 조약
베스트팔렌 조약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주권 평등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즉 기존 국가간의 서열, 주권 차등이 사라진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 등장 이전, 종교의 균열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정치 이익과 종교적인 신념이 충돌하는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맥락 하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가 이성'을 말하게 된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과 Raison d'etat
( 가톨릭 신부이면서 외상, 실질적인 정치적 결정을 도맡아 했다.
가톨릭 세력의 정치적 이익을 따라가지 않고 국가의 이성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침.
특히 독일의 통일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여러번 패배한 전적이 있음
하나의 정치 세력이 독일을 통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독일 대항 세력을 지원하였는데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으로 프랑스의 국교 카톨릭과 반대 세력이었다.)
리슐리외의 Raison d’etat
: 각각의 국가는 개인과는 별개의 차원의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행동한다.
현대에는 국가 이익 national interest의 개념으로 발전함.
(그는 프랑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유언장에 절대 raison d’etat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남기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평화는 그자체로서 의미있는 가치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와 같은 수준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전쟁이고 목표는 세력균형이었다.
: 어떠한 형태로든 각국의 균형을 맞추어 그에 따른 이익과 세력권의 확대를 보장받는 것.
그것이 리슐리외 추기경의 아이디어와 1600-1700년대 초반부를 대표하는 원칙
필요하다면 전쟁을 하고, 필요하다면 평화를 유지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전쟁을 해도 균형을 심각하게 파괴시키지는 말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Pentarchy로 나타나는 다섯 가지 강대국의 추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Pentarchy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5개 강대국이 파괴되면 균형이 유지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균형
1750년대의 7년 전쟁 – 첫 번째 세계대전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7년 전쟁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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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영국 vs. 프랑스 : 유럽, 아메리카 대륙(뉴올리언스, 퀘백)의 전쟁: 인디언들을 동원, 인도에서 각각 토호군과 동맹을 맺고 전쟁
민족주의의 태동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각 강대국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 자원을 확실하고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국내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형태의 민족국가, 근대국가, 국가이익이 부상하였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의 보편성은 힘을 상실하고 종교 전쟁은 차차 사라진다.
강력한 민족주의와 결부된 국가 이익이 이를 대체하고, 이는 170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민주주의의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하나의 민족과 국가 안에 누군가는 특권층이고 누군가는 노예여야 할 신분의 차등을 합리화할 기반이 사라지게 된다.
강력한 민족주의의 대두는 민족 내의 강력한 평등 사상을 불러일으키고,
민족 밖의 평등으로까지 확장되면 다시금 민족주의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 정신의 전파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담은 혁명 프랑스(나폴레옹)는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당시의 관점에서는 불법적이었던 도전을 시도하였다.
세력균형을 위해 강대국이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을 거부하고 프랑스 제국을 통해 세력 균형이 필요 없는 하나의 시스템을 건설하고자 함.
세력균형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나폴레옹이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 침공 이전까지의 프랑스 지도
이후 기존 국가들은 프랑스의 대외적 팽창을 두려워하며 뭉치게 되며, 이는 5번에 걸친 협상으로 대표된다.
개요
1789-1791에 전 세계의 공화국은 미국뿐이었다.
유럽 입장에서는 이를 대서양 건너 역사가 없는 국가의 특이한 체제쯤으로 얕잡아보았다.
따라서 프랑스가 '유럽 대륙 내'에 공화국을 선포하는 것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필니츠 선언: 프랑스를 제외한 4개국 참여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이후 프랑스를 침공하게 됨.
그러나 발미전투(1792년)에서 돌파에 실패한다.
필니츠 선언
「회담의 주요 내용은 폴란드 분할에 있어 양국이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투아 백작의 열성적인 설득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압박을 선언문 형식으로 내놓기로 동의하고
8월 27일에 《필니츠 선언》이라는 제목의 짧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 국왕의 문제는 유럽 전체 군주의 공통 관심사”이며, 프랑스 국왕을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두 군주는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사적 위협에 불과했고 전쟁 의지나 그 준비는 없었다.
그런데 이 선언은 망명 귀족을 매우 기쁘게 했고,
역시 루이 16세의 또다른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9월 10일 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맹렬한 항의 성명을 내고 협박의 강도를 더했다.
“만약 광신적인 악업으로 전하(루이 16세)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외국 열강의 군대가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임을 파리 시민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혁명파의 분노를 사서, 온건한 정당인 지롱드 당에서도 주전파라는 그룹이 등장하여 외국과 싸워 국왕의 반혁명을 폭로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애국심의 고양은 파리의 상 퀼로트들을 더욱 과격하게 자극했다.
어쨌든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둘러싼 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당시 독일 연합군(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지휘관,
괴테가 프랑스 혁명이 유럽의 기존 체제를 파괴할 것임을 예상하고
“나는 오늘 이 전투에서 역사의 새 챕터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의 방어가 성공한 이후 프랑스 혁명은 타국에 수출된다.
특히 타국 내의 불만 세력이 타깃이었다.
이후 캄포 포르미오 조약(1797) : 프랑스-오스트리아 평화조약으로 1차 대프랑스 동맹이 와해되었다.
이후 툴롱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체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여,
약탈과 정복을 통해 해군을 사서 자신이 스스로 창설한 해군을 가지고 카이로로 진출함.
이집트 원정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름.
울름,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물리치고, 독일도 물리친 후 틸지트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최종적인 합의를 보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3차 연합도 파괴하여 유럽 대륙을 점령함.
유럽 정치단위 수의 축소
1500년정도에 500개였던 정치단위들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거치며 270개 정도로 줄어들었다가,
나폴레옹을 거치며 이를 70개 정도로 정리되게 되었다.
(이 때, 프랑스 혁명 사상도 같이 전파되어 각국은 주권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 국가를 형성하게 됨)
이후 독일 통일을 통해 30개로 줄어들고 1900년대에 이르러 25개정도로 줄어들게 됨.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60만정도가 출발하여 모스크바에 다다를 때쯤, 전투, 탈영,전염병으로 인해 20만명정도밖에 남지 않음.
최종적으로 바르샤바까지 돌아온 사람들은 2만명 정도. 러시아는 프랑스군의 사기와 체력을 저하시키기 위해 계속 후퇴하는 전술을 택함.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4차 연합이 결성되어 연합군이 나폴레옹과 전쟁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엘바섬에 유배됨.
프랑스혁명은 이로써 종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나폴레옹의 지지 기반은 여전히 다수였으며,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는 계기가 됨.
5차 연합의 전투가 시작되고, 영국 지상군까지 동원되어 전투에 임하게 됨.
워털루(1815)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패하게 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나게 됨.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옆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보내져 병 치료를 위해 비소를 먹고 위암 혹은 비소중독으로 죽음.
비엔나 회의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비엔나 회의였다.
비엔나회의에는 크게 두 가지의 원칙이 있었음
1. 프랑스 봉쇄 (세력균형)
프랑스의 억지를 위해 기존 국경선을 바꾸어버렸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영토를 박탈하고 프랑스의 확대, 특히 동진을 막기 위해
국경선을 둘러싸고 각각의 국가들을 규모에 맞게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북동쪽에는 네덜란드 왕국을 배치(독립된 국가였던 벨기에가 약하니까 합병시킴), 프로이센,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를 배치,
남동쪽에는 사르디냐 왕국(훗날 이탈리아로 통일)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경선의 변경에 피해를 본 국가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보상하고자 했다. 특히 독일과 폴란드가 많은 조정을 받음
2. 정통주의/ 전통주의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혁명 세력의 사상을 억누르고
1789년 이전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문제는 혁명 세력이 이미 팔아버린 국유지를 사들인 세력들 - 26년간의 실질적 소유주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원상 회복을 요구받음.
국내적으로 엄청난 반발세력이 나타나고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독일 작센지역과 폴란드의 분할이 큰 문제로 나타난다.
특히 작센과 폴란드 지역의 문제가 영토문제로 비화되자 편이 나뉘어졌다.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이 영,오 vs 프로이센, 러 구도로 대립이 시작된다.
이 때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이 취할 수 있는 입장과 대항세력들의 반응을 예상하여 모든 경우의 수에 관한 문서를 제작하였다.
이를 위한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 밤마다 파티를 열어 비엔나 회의는 춤추는 회의라고 불리게 되며,
이러한 노력을 발판삼아 오스트리아는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l 영국과 러시아는 하나의 국가가 유럽 전체 대륙을 통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l 오스트리아는 독일 지역의 통제권을 많이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l 프로이센은 과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영토보다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주위에 각국이 배치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가들의 집단인 독일 연방이 탄생하게 된다.
이름만 남아있던 신성로마제국 대신 German Confederation 독일 연방에 50-60개 국가들이 속하게 된다.
1860년대 말, 독일 연방의 통일 문제가 대두된다.
Great German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
메테르니히의 오스트리아는 자신을 포함한 Great German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대독일주의).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영향력 하의 통일 독일, 소독일주의를 주창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독일 통일(1871)이 이루어진다.
(현재 오스트리아, 체코, 취리히에 독일어를 쓰는 언어권이 형성되어있는 이유)
+) 비엔나 회의를 하며 결정된 사항 중 “외교관의 서열” 문제가 있었다.
이는 최초로 국가들간에 지켜야할 규범들을 명문화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관행들을 성문화시킨 국제법의 시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발칸반도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오토만제국에서 프랑스 혁명의 아이디어가 전파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위협적인 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현재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의 일부) 역시
다민족 국가로써 민족주의 세력의 대두는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민감한 문제였다.
이에 비해 슬라브인이 압도적인 러시아와, 민족단위의 프랑스 프러시아는 같은 문제에 봉착하지 않음.
따라서 비엔나 회의에서 민족주의를 차단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 지도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음.
그렇기에 메테르니히가 이를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던 것.
따라서 비엔나 체제를 “제단과 왕의 단결”이라고 표현하게 됨
제단 – 구 체제를 대표한 카톨릭 세력과
왕 - 1789년 이전 정권을 잡았던 세력
의의
그러나 민족주의 민주주의, 프랑스 혁명의 혜택을 맛본 세력들로 인해 비엔나 체제는 국내적인 차원에서 막강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메테르니히는 근대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평화 체제를 만들었다.
평화라는 공통이익을 위해 어느정도씩 희생을 감수하면서 안정적인 체제가 유지된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를 현실주의의 논리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