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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 제바스티안 하프너 (1차세계대전 부분 요약-1)공부 이모저모 2022. 6. 8. 11:05
**피셔 논쟁 (프란츠 피셔 vs 게어하르트 리터)
피셔는 61년 『세계에의 도전』을 출간하면서 제국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이 전쟁에 적극적이었음을 주장하여,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기존의 보수적 사학(리터 등)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1914 이전 : 참모부와 도이치 제국 지도부의 동상이몽
베트만 홀벡(제국총리)의 생각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전쟁이 가장 유리하게 흘러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오스트리아의 참전 / 2) 사민당의 동참 / 3) 영국의 중립
사라예보 사건에의 대입 - 홀벡의 견해의 유리한 초기 상황이 만들어짐
1)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로 오스트리아 대 세르비아의 전쟁구도가 만들어짐. 은근슬쩍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 들면서 낄 수 있음
2) 도이치 사민당은 차르 러시아에 맞서는 것을 승인할 것
3) 영국은 역사상 순수한 동유럽의 문제에는 늘 개입하지 않았음. 따라서 즉시 개입하지 않을 것
-> 따라서 독일은 서부전선에 대하여는 방어적인 행동만을 취해 영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이었다.
1914 7월 6일 홀벡이 오스트리아에 내어 준 백지수표는 바로 위 생각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자기도 슐리펜계획같은게 있는 줄 몰랐겠지...116p (백지수표의 내용)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조치가 오스트리아 - 러시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오스트리아는 도이치 제국 폐하께서 동맹의 의무와 옛날의 우정을 지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서실 것을 확신해도 좋다."독일 군대 참모부의 생각 : 무조건 프랑스에 대해 번개전(슐리펜계획)
도이치-프랑스 국경선에서 번개전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
이는 근본적으로 영국의 반대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그 이유는
1)프랑스의 약화 - 도이치 세력권의 영불해협과 대서양으로의 확장 우려
2)완충국가로서의 벨기에 침공 - 영국 해안선을 직접 마주보는 국가.
따라서 벨기에의 중립성에 가장 큰 관심을 두는 나라는 언제나 영국이었다.
위기관리 실패와 전쟁의 발발 (1914.8.1)
전쟁 발발 이전까지 영국이 중재하는 다양한 외교적 문제해결 시도가 이어졌다.
런던에서 두 가지 제안이 나왔는데
1) 오스트리아-러시아 분쟁의 간접적 연루국(영/독/프/이)끼리 공동 제안 마련 -> 독일이 거절
2) 도이칠란트가 오스트리아를 설득하여 러시아의 개입을 가능한 막는 것 '베오그라드에서 정지' -> 독일의 소극적 반응
결국 오스트리아는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후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도이치 역시 총동원령을 내리는데 슐리펜계획으로 동부전선말고 서부전선의 대규모 행군이 시작된다...
런던 주재 도이치 대사의 급보 :
다음과 같이 오해했다 - 독일이 서부전선 방어 / 동부전선만 공격시 영국은 프랑스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이다
(영국이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안심..)독일 긴급회의 : 참모부 계획의 경직성
황제, 베트만, 몰트케장군의 조카 몰트케 다같이 모인 자리.
동부에서만 행군하자는 황제의 제안은 이미 전쟁이 시작되고 계획을 바꿀 수 없다는 조카 몰트케의 말에 그대로 무시되었다.
애초에 1913년 이후로 그는 동부전선 행군 계획을 중지했었음. 대안은 처음부터 X
결국 슐리펜 계획은 영국의 참전이 정치적으로 확정되었고, 독일은 처음부터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참모부가 아닌 지도부의 반응은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120p
베트만은 절망에 빠졌다. 군대가 이미 벨기에로 들어가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도, 그는 영국이 '찢어진 종잇조각' (벨기에의 중립성)을 위해 유럽의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전쟁에 뛰어들지 말라고 설득하려 절망적으로 노력했다. 너무 늦었다.비스마르크 시대와 빌헬름 시대의 차이점: 비관적 조심성 vs 낙관적 힘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독일 통일의 일등공신으로 추앙받는 헬무트 몰트케는 참모총장이던 시절에 언제나
'양면전쟁을 대비한 동,서부의 전략적 방어'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슐리펜은 1895년 처음으로 양면 전쟁을 1전선 전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러시아의 '느린 동원령' 이전 프랑스를 쳐서 전쟁에서 배제하고 러시아와 맞서는 (제정신?) 전략이었고,
조카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만 남겨두고 나머지 대안을 전부 없앴다.(제정신?)
이러한 군사계획의 변화과정을 통해 독일의 비관적 조심성이 낙관적 힘의 느낌으로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 슐리펜계획의 실패와 전쟁의 장기화 : 방어 우위 군사기술
독일을 포함한 모든 강대국은 초반부 공세적인 전술로 빠르게 승기를 잡기를 원했으나 모두 실패함
--> 이유: 당시 군사기술로는 방어가 공격보다 우세했다.
--> 적국의 완전한 배제가 불가능하다.
--> 결국 소모전/장기전이 되었다.
소모전과 장기전이 독일에 미친 불리한 영향: 해상봉쇄
전쟁이 장기화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보급, 물자이다.
영국의 해상봉쇄 이후 첫 해에는 보급에 문제가 없었지만, 점점 식량이 부족해지고,
연합국의 전체 경제적 크기 > 도이치+오헝제국
이었으므로 1차대전은 전투로서 승기를 잡는 것이 아닌, 적을 지치게 하여 평화조약을 유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 참전 전 까지의 이야기.
제1차세계대전시 독일의 두 전략: 1. 역봉쇄작전(무제한 잠수함 작전) 2. 러시아의 혁명화
1. 역 봉쇄작전 -> 미국 참전
전쟁 도중 도이치 해군은 잠수함을 통해 영국을 역으로 봉쇄하자는 발상을 하였다.
그리고 봉쇄 지역의 '모든 배'를 경고 없이 침몰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기술 부족으로 잠수함은 기본적으로 취약했다.
124p
1916년과 1917년 기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 이 '무제한 잠수함'전쟁은, 단순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를 매우 강력하게 만들어서 도이치 제국의 모든 승리의 전망을, 심지어는 탈진해서 나오는 평화조약에 대한 전망조차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바로 미국의 참전을 불러들인 것이다.참전 이전 미국의 태도 : 고립주의
윌슨 대통령은 2차대전의 루즈벨트와 달리 적절한 평화 중재자로서의 역할만 원했으며, 1916년 실제로 계획도 수립하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전쟁은 가망이 사라졌다고 보아도 된다.
2. 러시아의 혁명화 -> 전쟁에서 러시아 배제
1차대전 발발 후 러시아 - 예상보다 약했다 why? 늦은 산업화 때문, 현대적 무기X, 땅은 큰데 교통 발달 X
=> 1916년 이후 국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1917 2월 혁명 - 도시민의 기아 혁명이자, 전쟁의 지속을 반대하는 농민 병사들의 궐기
But 자유민주주의 정부는 정권을 잡고 '전쟁의 지속'을 택하는 애국적 오류를 범함
이에 독일은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가게끔 도와, 혁명이 계속되도록 만들었다. (10월 혁명)
이를 통해 독일은 미국 참전 이전 잠시나마 1전선 전쟁에서 번개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레닌은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의 기적의 무기였다.
레닌의 계획은, 러시아를 항구적으로 전쟁에서 배제하려는 도이치 제국의 소망과 맞아떨어졌다.
-127p전쟁중 독일 내부의 변화: 1) 의회 분열, 2) 2차 총사령부의 실각, 3) 베트만 홀벡의 실각
1) 사민당 내부의 분열
1914년 전 사민당 : 혁명정당으로서 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이었지만 정치에서 배제되었음
1914년 이후 사민당: 정치적 전쟁기구의 일부가 됨 -베트만 홀벡의 바램대로 됨 (전쟁채권 발행 승인 등)
1917년 사민당의 분열 - 당의 애국적 전쟁 정책을 못마땅해하는 좌익 세력이 '독립 사회민주당'(소수)을 설립함
의회의 분열
1917년 의회 다수파: 사민당 + 좌익 자유주의자 + 중앙당 vs. 우파+ 우익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등과 언론전이 시작됨
'전쟁 목적 논쟁' :
우파 - 강력한 전쟁 목적을 실현하려면 먼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완벽히 승리해야 한다.
좌파 - 1914년의 국경선을 토대로 합의에 의한 평화조약을 이루자
(둘 다 이미 늦어버린 생각들...)
=> 결국 의회 다수파는 전쟁의 지속을 막지 못했고, 전후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2) 1916 2차 총사령부의 실각 -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지휘의 제 3차 총사령부 등장
완벽한 우파의 사령부 등장으로 '완벽한 승리' 와 그에 따른 이익을 얻기 위해 도박을 감수하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무제한잠수함 전쟁과 러시아의 혁명화 모두 이들 치하에서 계획됨
3) 베트만 홀벡의 실각
베트만 홀벡은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의회 다수파와 우파 모두가 없어지기를 바랬다. ㅠㅠ
그렇게 그는 실각하고, 다음과 같은 형국이 나타난다.
독일의 외교 - 군 총사령부가 지휘
독일의 정치 - 의회 다수파가 장악
황제 - 이리저리 이끌리는 버드나무 가지...
1917년 독일
<국내>
1. 헌법 기능의 마비
2. 군 지휘부와 의회 다수파의 결탁 -> 1916년 총력전 결의/ 보조인력법 결의 (노조 협력, 임금협상권 등 - 혁명적인 장치들
3. 황제와 제국 총리 권력의 약화
<국외>
서부전선 교착 상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실패
미국의 선전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