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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이근욱 국제정치론 : 5회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공부 이모저모/국제정치론(2014) 2022. 6. 1. 22:44

    http://ocw.sogang.ac.kr/courses/home?pageType=LECTURE&cate_02=33&cate_03=591&cate_type=depart&classYear=&semester=&profSeq=#

     

    SOGANG OCW

     

    ocw.sogang.ac.kr

    위 링크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필기라기 보다는 메모에 가깝기에 단순 참고용이다*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1. 개괄

    이번 시간에는 이제까지 배운 고전적 금본위제의 파괴와 국제정치적 역동관계를 다룰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경제체제가 혼자서도 잘 굴러간다고 주장하지만, 토마스 프리드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주장의 위험을 지적한다.

     

    World is flat, but it's fragile

     

    (Thomas Friedman이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세계 전망을 예측한 책 인용/ 21세기 기술의 발달로 개인 단위로 평평한 세계라는 플랫폼 속에서 협업하고 기회를 포착한다는 것 - 그러나 그는 아래의 인터뷰에서처럼 극도로 연결되고 평탄화된 세상은 그만큼 불안정이 빠르게 확산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함)

     

    https://www.chinausfocus.com/foreign-policy/the-world-is-faster-deeper-more-fused-open-and-fragile

     

    The World is Faster, Deeper, More Fused, Open and Fragile

    On March 29, the Center for China and Globalization (CCG) hosted a dialogue between Thomas L. Friedman, bestselling author, reporter, New York Times columnist, and three-time Pulitzer Prize winner and Wang Huiyao, founder and president of CCG. Following ar

    www.chinausfocus.com

     

    1914년에도 사라예보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서

    당시 세계가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정치적 역동관계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저번 시간에도 말했듯,

    영국의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발전에 인도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식민지가 미미했던 독일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1914년경 존재했던 영국 영국 자동차 기업들은 오늘날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독일의 경우 벤츠를 비롯해 지금까지도 유력한 기업들이 존재한다.

    독일의 제조업은 오늘날에도 힘이 있다.

     

    영국은 경제성장과 힘의 팽창 속도가 독일보다 느렸다.

    절대적 성장을 하지 않은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적 격차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독일이 매년 7퍼센트 성장했다면 영국은 2,3퍼센트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굉장히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세력균형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격차가 세계 1차대전 전까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2. 투키디데스 함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타난 투키디데스 함정>

     

    장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세력 균형의 변화를 처음으로 강조했던 것은 바로 투키디데스이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군인이었던 그는 해군제독으로 일하다 실패하고 전쟁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탄생한 역작이 21세기에 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체계적이고 현대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투키디데스는 현실에서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모아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테네의 빠른 성장에 스파르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가 또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는 크게 두 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해군력 중심의  세력, 스파르타를 대표로 하는 육군력 중심의 세력이다. 

     

    이 두 세력 중 아테네가 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확대한다.

    스파르타는 이 상황에 굉장한 위협을 느끼며, 아테네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스파르타의 엘리트 중심 전체주의 사회를 무너뜨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방법은 딱 하나였다. 상대적 힘이 우위에 있는 바로 지금 아테네를 선제 공격하는 것이다.

     

    아테네가 빠르게 힘을 축적한다는 사실 하나와 미래에 대한 공포심이 스파르타를 전쟁으로 이끌었다.

    세력균형의 변화는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가져온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공포심은 예방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Graham Allison-Thucydides Trap>

    그래이엄 앨리슨은 2012년 여름 financial times에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글을 투고하면서 다시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교훈에 주목하게 했다. ( 강의가 2014년이라 그렇지 그 후 그는 '예정된 전쟁'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다시금 투키디데스 함정을 집대성하였다.)

     

    태평양을 둘러싼 두 강대국 미중관계에 대한 분석이었다. 부상국이었던 아테네가 중국에 해당하고, 쇠퇴국이었단 스파르타가 미국에 대응된다.

    <이는 다시 돌아와서 제 1차 세계대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독일이 바로 부상국인 아테네가 되며, 영국이 쇠퇴국인 스파르타에 해당하게 된다.>

     

    투키디데스 트랩을 주장한 그래이엄 앨리슨은 15세기 말부터 이후 16개정도의 도전시도가 있었고 그중 12번의 전쟁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오늘날의 미중 관계는 13번째의 전쟁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인가? 아래는 투키디데스 함정 프로젝트를 통해 그가 정리한 도전 사례와 전쟁의 발발 여부를 정리한 표이다.

     

    출처:&nbsp;https://www.belfercenter.org/thucydides-trap/resources/case-file-graphic

    <Memorandum by Mr.Eyre Crowe>

     

    전간기에 쓰여진 영국 정부 차원에서 1차 대전을 분석한 문서인 British documents on the origins of the war에서

    중요한 문서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Memorandum by Mr.Eyre Crowe이다.


    Eyre Crowe는 독일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다녔지만 영국 외무성 고위직을 지낸 외교관이었다.

    독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외교관으로서 그는 독일을 굉장히 경계했다.

     

    그는 1907년 새해 첫날부터 프랑스와 독일에 관해 크로우 메모랜덤이라 불리는 메모를 적는다.

     

    1 january 1907

    Memorandum on the Present State of Relations with France and Germany

     

    내용)

    독일이 공격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별 의미가 없다.

    세력균형 관점에서 독일은 분명 성장을 하고 있고, 영국이 이에 혼자 대응하기는 어려우므로

    프랑스,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혹은 영국 독자적인 군사 증강을 통해 극복을 도모해야 한다. (Balancing)

     

    그의 우려는 1914년 현실이 되었고, 또 시간이 지나 그의 경고는 다시금 미중관계를 비추고 있다.

     

     

    크로우가 독일을 경계했다는 것을 견지할 때, 그와 달리 독일을 공연히 자극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이들은영국 외무성,육군성,해군성에 모두 존재했다. 

     

    반대쪽 입장의 상황들의 주장은, 독일의 힘의 증가가 독일이 공격적 의도를 보이기 전까지는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입장으로 투키디데스 함정을 다시 살펴보면

    16번의 도전 시도 중 4번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5센트의 가능성으로 세상은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력균형만이 국가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크로우는 의도가 아닌 균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엇에 균형화를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의가 쉽지 않다.

    따라서 월트의 위협균형론을 가지고 논의를 해 볼 수 있다.

     

    3. 왈트의 위협균형론

    위협을 말할 때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간다.

    1. Capability - 상대적인 능력 (전체적 국력 혹은 군사력 등)

    2. Intention -  의도 (공격적 의도가 있는가?)

    3. Geographic proximity - 지리적으로 좀 가까워야 한다. 러시아는 인근의 크림반도를 침공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요소 모두가 필요하며, 위협은 이 세 요소의 곱하기로서 표현될 수 있다.

     

    Capability X Intention X Geographic Proximity

     

    북한을 예를 들어 보자면, 휴전 이후에도 북한은 계속 우리에게 위협적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있고, 발작적으로 공격적이었다가 말았다가 한다,

    그러나 Capability의 관점으로 봤을 때, 남한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

     

    이를 위 식에 대입하면 capability (굉장히 감소) X Intention(?) X Geographic Proximity (고정)이므로 북한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크기는 작아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북한이 1970년대 북한보다 덜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두 계량화할 수 없기에 확실하게 추론할 수는 없다. 

     

    즉, 객관성을 띠는 지리적 인접성을 논외로 하고, Capability와 Intention을 곱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이에 따르면

    어느 국가가 아무리 공격적이더라도 힘이 0이면 신경쓸 필요가 없다.

    중국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공격적 의도가 0이면 신경쓸 필요가 없다.

    4. 비스마르크 시대와 그 퇴임 이후 독일의 변화

    이러한 문제는 1870년경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의 취약성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독일어를 쓰는 공통점을 가진 지역들이 통일 이후 하나의 국가라는 아이이디어를 가지게 되기까지 공격적이어서도 안되고, 전쟁을 해서도 안되고, 필사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교수님이 이거랑 위협이랑 어떻게 연결되는지 안 설명해주셔서 위협균형론과 비스마르크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capability도 높은 독일이 intention을 0으로 만들어서 다른 국가에 최소한의 위협을 주고자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신 게 아닐까?...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세 번의 전쟁을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평화애호적으로 변한다.

    통일 이전에는 동맹을 이용해서 전쟁을 일삼지만, 이후에는 동맹국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문화, 언어적으로 가까운 오-헝 제국과 동맹을 맺는다.

    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상부상조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비스마르크 왈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과의 동맹은 오-헝제국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오-헝제국을 지켜보니까 기본적으로 무력을 통해 문제해결을 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독일은 최소한 한 세대정도의 평화를 원하고, 이를 위해

    비스마르크에 따르면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라는 말을 부리는 마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동맹은 비엔나를 컨트롤하는 '고삐'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무모한 전쟁으로 독일이 연루되는 일은 막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그 뒷 세대들은 이러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이후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은 다음과 같은 발언까지 한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독일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맹국이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독일을 버린다면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독일이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편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1907년에 나왔다.

    크로우 메모랜덤 역시 1907년이다.

    즉, 1907년정도가 되면 전운이 감돌아 사람들이 이제는 끝났다 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아닐까...

     

    <동맹의 경직화>

    헨리 키신저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군사 동맹은 국가의 목표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만든 수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동맹이 경직화되면 수단으로서의 동맹이 국가의 정책과 목표 자체를 결정하게 된다.

    이제는 군사동맹 자체가 너무 비대하고 중요해져 버리게 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위의 문제를 미리 경계했고, 매우 독하게 막았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과 동맹을 체결한 후, 자국 군인들에게 오-헝제국 군대 지휘관과 허락 없이 군사작전을 조율한다거나 작전 계획을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한 경고를 한다. 군사동맹이 거꾸로 국가정책을 결정하게되는 상황이 오는 것을 처음부터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독일 군 지휘관이 가서 자기들 마음대로 비엔나의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만나 함부로 어떤 결정을 해서, 유사시 수상 외교장관 군인들한테 '이러한 계획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할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역시 퇴임하게 되고,

    비스마르크의 후임들은 동맹의 경직화를 막지 못했다.

    국가 정책이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고, 동맹 역시도 변화해야 하는데 어느 시점에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키신저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동맹의 경직화를 Military Doomsday Machine (군사적 파멸의 기계)이라고 불렀다.

     

    <균형자의 소멸>

    동맹의 경직화가 Military Doomsday Machine이라면

    Diplomatic Doomsday Machine 역시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균형자의 소멸'로 나타낼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영국이 주로 균형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느 국가하고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필요한 경우가 있을 때만 개입한다. A와 B가 싸워서 A가 이길 것 같으면 영국은 B 편에 들어간다.

    B편이 이길 것 같으면 A편에 들어간다. 지는 편에 들어가서 영국은 결국 둘을 '비기게 만든다' 

    그렇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5년 전에 지원했던 팀이 다시 전쟁을 해서 이길것같다면 영국은 거리낌없이 그 반대편을 지원한다.

    어느 누구도 확실한 승리와 확실한 실패를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국가가 살아남도록 했다.

     

     

    -20세기 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영국이 전과 같이 행동하기에는 독일의 힘이 너무 세 져 버렸다.

    때문에, 독일에 직접 대응하지 못하고 그 반대편에 선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한 편으로, 독일 이탈리아 오헝제국이 한 편으로 유럽 대륙의 강대국이 둘로 쪼개지게 된 것이다.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독일에게는 오헝제국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가 박쥐처럼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중립국 선언을 해버린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다음,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눈치를 본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접근해서 딜을 건다. 동시에 베를린과 비엔나에도 접근해서 딜을 건다. 도와줘서 이기면 뭐 줄래?

    그렇게 해서 더 많이 주기로 약속한 편에 붙는다. 그렇게 1915년이 되면 이탈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편에 붙어 과거 자기 동맹국을 공격했다.

     

     

    단순히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을 넘어서 또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안보딜레마>

     

    그 문제는 안보딜레마와 관련된 부분이다.

    안보딜레마에서 공격 우위와 동시에 공격방어 구분 가능성이 낮은 경우가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는 1914년의 상황에 해당하는데

     

    먼저 공격 우위의 측면에서

    많은 국가들이 실제로는 방어에 유리했음에도 본인들이 공격에 유리한 군사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또한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공격적인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공격이 더유리한지 방어가 유리한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에서라도 공격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공격-방어 구분가능성에서도

    상대방의 군사력이 공격과 방어 중 어느 것에 집중되었는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Offensive and Indistinction 의 최악의 안보딜레마 상황이 되고, 이는 결국 통제할 수가 없었다.

     

    <보호무역과 식민지 팽창 정책>

    비스마르크 퇴임 이후 발생했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Iron and Rye Coaliton" 철과 호밀의 연합이었다.

    독일은 융커(농업귀족)와 산업자본가를 위해 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실시했다.

     

    러시아로부터 식량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영국에서 기술과 공산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또한 비스마르크 퇴임 이후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로비를 했고, 성공했다.

     

    그래서 파푸아뉴기니를 가져갔다.

    독일에서 파푸아뉴기니를 어떻게 갈 건가? 영국 해군과 무사히 대적할 수 있을 만큼의 해군력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출발점은 파푸아뉴기니인데, 이를 지키기 위해 영국과의 대립을 감수하고, 해군력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건설해야 한다?

     

    놀랍게도 이 의견이 통했다.

    따라서 파푸아뉴기니를 지키기 위해 , 칭다오를 지키기 위해 독일이 영국 해군력의 맞먹을 정도로 해군력을 증강한다. 

     

    영국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미 대다수의 국가가 선진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독일 입장에서는 눈길이 가는 곳은 바로 아프리카였다. 그중에서 모로코집적댄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의 대립이 벌어진다.

     

    일이 그런식으로 흘러가면서 프랑스와 독일간 분쟁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독일이 보인 공격적인 의도가 식민지 확장과 해군력 확장과 연결되면서 영국이 프랑스 편을 굉장히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당시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를 잘 도와줬으면 모르겠는데, 오-헝 제국은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니까 쳐다도 안 봤고,

    영국은 독일이 모로코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독일은 그렇게 서서히 고립된다.

    고립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독일은 더 공격적이고 용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황은 더 고립된다. 악순환이 된다.

     

    그 악순환은 안보딜레마와 연관되어 또다시 악화되었다.

     

    4. 제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전쟁의 원인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도대체 군인만 천만명이 죽은 이 전쟁의 원인이 뭐냐.

     

    그런데 역사적인 설명을 다 빼고 이론적인 설명으로 통찰해 봤을 때.

    조셉 나이가 이야기했을 때처럼 거시적인 요인들이 있고, 촉발 요인들이 따로 있다.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세력균형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중간정도 레벨의 문제는 크게 두가지였다.

     

    1. 안보딜레마상황 하 불가피한 전쟁이었는가

    2. 독일이 현상타파적이어서 전쟁이 일어났는가

     

    많은 사람들이 1920년대 1930년대까지는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을 하고 사람들이 깨달았다.

    1914년의 독일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구나.

    1914년의 독일은 현상타파국이라고 하기에는 나치 독일의 새발의 피였다.

     

    현재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주장은 바로 1차 대전의 원인을 안보딜레마에서 찾는 것이다.

    독일이 현상타파 성향이 아예 없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성향이 1차 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될 만큼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독일이 만약 현상유지국가에 더 가까운 상태에서

    공격 우위, 공격방어 구분가능성 불확실 상황으로 인지했을 때, 왜 독일이 그렇게 행동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해답은 다민족과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Balkan Trouble> 

    발칸지역의 100년간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었다.

    발칸 안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내부 갈등이 크게 터지지 않도록 그림과 같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등이 누르고 있었다.

    이 솥이 터지면 오스트리아 혹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장 큰 손해를 입게 될 터였다.

    다민족들은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한복판에 들어가있었다.

    발칸문제 :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는 그냥 오스트리아였지만 다민족국가를 오스트리아의 힘 하나로만 통치하기에 버거워져 헝가리를 승격시켜 나란히 통치하는 형태가 되었다(1918년 전까지). 외교 국방은 비엔나에서 통제하지만 그 외 교육 복지 교통 세금 등의 국내정치적 문제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의 합의 하에 운영되도록 한다.

     

    다민족국가에게 있어 민족주의의 확산은 국가의 해체를 의미했다.

     

    슬라브 민족주의와 세르비아가 확대되면 다민족국가로서 위협을 받는 것은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터키 제국이었다.

    특히 슬라브 민족주의 (러시아를 등에 업고 슬라브인끼리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를 주장함)의 중심은 세르비아였다.

    전쟁 이후 슬라브 민족주의는 승리를 거둔다.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국가가 세워지는데, 영어로는 great slav country이고 이를 세르비아에서 사용하는 말을 가져오면 유고슬라비아이다.

     

     

    불행히도 독일은 하필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동맹관계에 놓여 되어있었다.

    독일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와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동맹국이 민족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관련되어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시에 '선택의 깔대기'가 좁아지고, 동맹국들은 가뜩이나 민족주의때문에 약화되고, 동맹국이 없어지게 되면 독일 혼자 남을 것이라는 불안안감 ,독일이 전쟁을 하면 인구와 기술력으로 한 방에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 그리고 거의 100년동안 유럽에 대규모 전투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평화를 굉장히 쉽게 생각했다.

    위기를 쉽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위기를 어떻게 통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모두 거시적이고 중규모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immediate cause/촉발 원인으로서 가브리엘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 사건을 통해 WW1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암살사건은 잘 수습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당시를 살펴보면 평화에 대한 자만심/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 동맹국의 민족주의 문제때문에 독일의 선택의 깔대기 줄어들어 있었다는 사실/ 안보딜레마가 혼재했다.

    그렇게 악재란 악재는 한꺼번에 다 겹쳐 위기 수습이 전혀 되지 않는다. 

     

    더욱이 동맹의 경직화 하에서 독일 군부가 직접 외교를 주도해버린다.

     

    <슐리펜 계획>

    1.러시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를 공격해야 된다고 한다.

    2.프랑스를 통과하기 위해서 벨기에를 뚫고 가자고 한다.

    3. 그렇게 프랑스를 무찌른 후 러시아를 무찌른다.

     

    그날 밤에 회의가 벌어지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군부:

    우리는 프랑스를 공격합니다.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를 공격합니다

     

    수상/ 외교관:

    아니 러시아한테 선전포고했는데 왜 벨기에를 공격하냐?

    러시아를 공격하는 거 아니냐?

     

    군부:

    아닙니다. 러시아군이 준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그 사이에 프랑스를 공격해야 합니다.

     

    수상/외교관들:

    그럼 프랑스를 공격해라!

     

    군부:

    아닙니다. 프랑스를 공격하려면 벨기에를 공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커진다.

     

    <전쟁의 확산>

    더 큰 문제는 초반에 영국이 무엇을 할 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다 독일이 벨기에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그제서야 참전을 결정한다.

     

    벨기에는 중립국이고, 중립을 보장해주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했으면 모르겠지만,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기본적으로 영국의 입장이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확실하게 참전하는 쪽으로 바뀐다.

    독일-러시아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다 문제가 점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영국이 참전한다는 뜻은 영국과 관련된 무역망들을 끊어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독일은 영국을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잠수함을 동원해서 영국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건을 다 차단해버리기를 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오는 밀, 소고기 등등을 다 차단하면 영국에는 큰 타격이었다.

    결국 영국은 6주분의 식량까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없던 아르헨티나와 미국은 상황이 달랐다.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 역시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한 작전에 당했다.

    그렇게 미국이 전쟁에 끼어든다.

    독일은 얌전히 러시아와 싸웠으면 된다.

    공연히 프랑스를 공격하게 되고,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를 공격하게 되고, 영국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무제한 잠수한 작전을 쓰고, 결국 미국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다음과 같은 연설로 참전을 독려한다.

    이 전쟁은 해양 선박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련된 전쟁이고, 이 전쟁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전쟁. 인류 역사상 마지막 전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군은 이긴다.

     

    전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1914년 이전 존재했던 모든 정치질서, 경제질서의 파괴였다.

     

    기존 자유무역질서에서 존재했떤 모든 경제적 관계가 차단되고,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이 되어 사라지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역시 분열되어 사라지고

    러시아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 되어버렸고

    폴란드가 새로 생겨버렸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기념일은 11.11이다.

     

    그 날 이후로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었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게 된다.

    이를 위해 희생된 장병들만 1000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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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ylor Fuwi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