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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근욱 국제정치론 : 4회차 (고전적 금본위제도와 주변부의 경험)공부 이모저모/국제정치론(2014) 2022. 5. 28. 20:38
SOGANG OCW
ocw.sogang.ac.kr
위 링크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필기라기 보다는 메모에 가깝기에 단순 참고용이다*
고전적 금본위제도와 주변부의 경험
1. 서론
지금까지1914년까지의 체제가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19세기 고전적 금본위제도의 안정성을
1) 영국 패권
2) 자기조정적 국내체제
3) 제한적 민주주의 체제(국내적 희생을 느끼는 이들의 이익이 반영되지 않는 정치체제)
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중심부가 아닌 그 주변부의 국가는 어떠했는가? 중심부 국가들 내에서는 어떠한 갈등 요인이 존재했는가?
기본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늘린다는 이점만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정치적인 갈등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고전적 금본위제 역시 새로운 기술로서 정치적 갈등을 일으킨 요인이었다.
2. 식민지의 이익?
과거 고전적 금본위제의 주변부는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고는 했다.
콩고 지역(자이레)은 1914년까지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공식적인 식민지가 아니라 벨기에 국왕의 사유지 지위였다.
공적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았던 콩고는 레오폴드 2세 벨기에 국왕에 의해 어마어마한 착취를 당한다.
콩고에서는 고무 그리고 커피가 대량 생산되었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로 손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끔찍한 형태의 압제가 이루어졌던 식민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식민지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식민지를 왜 가지고자 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
1. 식민지를 자원 확보와 시장의 개척 때문에 가진다?
그러나 자원 확보/ 시장의 개척은 서로 모순된다.
콩고의 경우 착취를 통해 '자원 확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시장의 개척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이런 식으로 착취당하면서 벨기에와 다른 나라의 물품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구매력은 생길 수 없다.
착취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생필품을 살 만큼 이상의 구매력은 사라져버린다.
즉, 자원의 확보는 국제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자원가격을 매겨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에서 가져간다면 그것은 착취고, 그 지역은 자연스레 상품의 구매력을 확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상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대상 지역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독일이 경제성장하는데 아래와 같은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래의 지역은 비스마르크 퇴임 이후 독일이 확보한 식민지이다.
원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가 쓸데없는 부동산이라고 할 만큼 식민지에 관심이 없었다.
독일의 부상 과정을 살펴보면 독일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식민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독일의 해외 식민지 어쩌면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식민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1914년을 기준으로 보면 영국은 보면 압도적인 식민지 차이에도 독일에 국력을 따라잡힌다.
식민지가 경제 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이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3.식민지를 가졌을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통한 이익?>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막대한 행정비용을 들여야만 했다. 군대, 경찰, 공무원이 투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간접시설을 구축하느라 또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 물론 인도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도 있었고,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이것이 영국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게 지론이다.
산업경쟁력의 후퇴
칼 맑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인도 내의 수공업은 맨체스터의 면직물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랬기에 영국은 인도에 공장제 물건을 많이 팔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 영국이 식민지를 가져서 이익을 보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국의 산업은 인도라는 시장의 존재 때문에 안주하게 되었다.
좋은 품질과 경쟁력있는 상품을 제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Low quality, Cheap product를 위한 시장에 만족했다.
그 결과 영국의 산업은 인도를 제외한 세계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반대로 식민지가 없어 품질 하나로 승부를 봐야 했던 독일 기업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14년 상황에서 영국이 아니라 독일이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가지게 된 것 이유를 이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영국이 식민지를 가져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맨체스터에서 대충 티셔츠 찍어서 봄베이 뭄바이로 가지고 오면 다 팔려버리고 새로운 물건은 필요가 없다.
그렇게 인도 시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경쟁력은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모두의 이익이었는가?>
또 다른 측면에서
과연 누가 이익을 봤을까 ?
인도 통치시, 인도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기는 하지만 영국의 모든 대차대조표를 보면, 그냥 본전만 했다고 볼 수 있다.
주둔군 비용, 경찰 행정비용이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세금 걷어봤자 큰 이득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도움을 봤던 사람들이라고는 인도에 주둔해서 승진기회를 포착했던 군인, 경찰 정도?
국제시장에서 독일제 미국제와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기업은 인도 지배의 도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 전체로서, 장기적인 이익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일부의 이익을 위해 국가 전체의 희생이 감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Rogowski : Commerce and Coalitions - Figure 1
*비교우위 - 생산요소의 부존비율이 결정
*스톨퍼 사무엘슨 정리 - 비교우위를 가진 산업의 종사자들이 이득을 본다.
*그러면 누가 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가? = 상대적으로 풍부한 생산요소를 가진 산업
경제학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이 매우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봤을 때에는 굉장히 중요한 생산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토지이다.
이에 따를 때, 4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Advanced Economy는 자본이 풍부하고
Developing Economy는 자본이 부족하다.
그리고 Land/Labor ratio 는 인구밀도에 역수를 취한 것이다.
따라서 Land/Labor ratio 가 높은 국가는 인구밀도가 낮으므로 인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1번 상황)
잘살고 땅이 넓은데 사람이 별로 없는 동네가 1번이다.
여기서는 자유무역에 자본가들이 찬성하고 노동자들이 반대한다.
4번 상황)
반대로 경제도 안좋고 땅도 좁은데 사람만 많은 동네는 당연히 노동자가 자유무역에 찬성하고 자본가들이 반대할 것이다.
2번 상황)
두번째 칸을 보면, 좁은 땅에 자본과 노동이 풍부한 경우로, 싱가폴 같은 나라들을 떠올리면 된다.
자본과 노동이 자유무역에 찬성하고 토지가 자유무역에 반대한다.
3번 상황)
세번재 칸은 토지가 풍부하므로 토지를 가진 사람만 자유무역에 찬성한다.
이 네 가지를 놓고 봤을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본 노동 토지가 무역과 관련하여 항상 일관적인 의견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생산요소가 상대적으로 풍부한가, 적은가(생산요소의 부존비율)에 따라 무역에 따른 선호가 달리 결정된다.
또 파트너 역시 바뀐다. 노동과 자본이 한 편이 되어 자유무역을 지지할 수도 있다.
결국 생산요소의 부존비율이 무역에 관한 논쟁에 결정적 요소가 된다.
노동이 항상 자유무역에 반대한다는 아이디어는 틀린 것이다. 생산요소의 부존비율이 중요하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은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변할 수 있다.
각각의 국가 내부에서도 정책 선호가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rogowski의 commerce and coalitions이라는 책에서는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은 표를 제시한다.
그는 이 책을 쓰고 무역 과 정치에 관한 확실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무역에 대한 정치적 선호는 국회에서 관세법이 통과될 때, 입법부에서 결정되므로 무역 정책은 결국 선거 이슈라고 볼 수 있다.
선거와 관련해서 무역정책이 대두되었을때, 이에 대한 정당과 세력간 연합이 어떠한 균열 cleavage을 가져오는가를 그는 이렇게 제시하였다.
1번 표에 따른 상황은 아래의 결과와 이어진다.
4. Rogowski : Commerce and Coalitions - Figure 2
첫 번째 표와 두 번째 표는 내용만 다르고 분류는 똑같다. [각 상황의 개괄적 설명]
1번 상황)
자본과 토지 세력이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보호무역은 노동이 지지한다.
4번 상황)
정 반대는 4번째 칸이다.
자본이 부족하고, 땅도 부족하고 노동만 많은 상황에서는 지주와 자본가 계급이 힘을 합쳐 노동자에 대적한다.
통일 이전의 독일과, 칼 맑스의 사회주의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Class cleavage: 계급 갈등의 상황이다.
2번 상황)
자본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노동이 풍부한 두 번째 칸이 있다. 홍콩, 싱가폴, 쿠웨이트 등등이 될 것이다.
이 지역은 따라서 상대적으로 보기 힘든 유형인데,
자본과 노동이 한 편이 되어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지주들이 보호무역을 주장한다.
이 지역에서는 농업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도 없다. 그리고 남아있는 농업세력 지주들은 이를 보호하려고 어마어마한 노력을 한다.
결국 이 지역에서는 농업과 식량 문제를 두고 많이 싸운다고 볼 수 있다.
이를 Urban-Rural Cleavage : 도농 갈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3번 상황)
그리고 세 번째 지역은 땅이 풍부하고,
노동과 자본이 부족하다.
이 상황에서 노동과 자본이 힘을 합해 제조업 상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하고, 토지는 농업생산물을 수출하고자 노력한다.
이 역시 토지 vs. 노동/자본 이라는 점에서 Urban-Rural cleavage : 도농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적용]
이 표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각 상황이 고정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은 충분히 변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사람이 바뀌고, 이민 정책도 바뀌게 된다.
첫번째 상황(자본.토지: 자유무역 지지/ 노동: 보호무역 지지)을 예로 들어보자.
외국에서 노동자가 들어오면 기존 노동자들은 자신의 파이를 뺏길까 위협을 느낀다.
따라서 이 경우, 기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그 나라의 노동법이 결정되고 이민정책이 결정된다.
외국인 노동자는 외국인이라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투표권이 있는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 미국 (3번 상황 US Populism)
당시로서는 개도국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잠재력을 곁들인...
미영전쟁이 끝난 1814년의은 노동도 자본도 부족한 곳이었다.
국내적인 대립은 따라서 노동과 자본이 한 편을 먹고 토지(지주, 농민들)에 대립하는 형상으로 나타났다.
무역과 관련해서는 공장 주인과 공장 노동자들이 한편이다. 농장주들은 농민주와 한 편이다.
따라서 도-농 갈등이 부각 되었다. (표에서의 3번 상황: URBAN-RURAL conflict)
<남부와 북부의 대립>
1. 무역 갈등
남부지역(농촌)의 입장에서는 농업 등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다 발달된 유럽에 있었다.
따라서 남부 출신은 유럽과의 자유무역을 통해 영국에서 물건을 가져오려 하지 미국 물건을 사려 하지 않았다.
북부지역(공업도시)에서는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미국시장에 가져다 파는 것이 관심사였다.
따라서 북부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물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무역을 지지했다.
2. 노예 문제
북부는 근본적으로 노동자가 필요했다. 노예 출신의 사람이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남부는 노예를 풀어주는 순간 엄청난 피해를 떠안게 된다.
남북전쟁의 큰 요인은 바로 이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의 대립이었다.
남부는 큰 손이었던 남부를 위해 영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But England is...)
북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해야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남부 사람들이 반대로 자유무역을 이해고 그 이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역시 아니다.
그저 자신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 무엇을 지지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비교우위 산업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갈등은 남북전쟁이라는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고, 50만명이 죽고 끝난다.
남부의 정치적 세력은 무너지고, 미국의 무역 정책은 보호무역으로 바뀐다. 곧 북부가 승리한 것이다.
<남북 전쟁 이후의 미국>
세상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고 나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의 문제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두 번째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북부 사람들은 남부의 세력을 처리하고 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서부지역에서 새로이 등장한 세력이 자유무역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 북부 전역 군인으로서 전역한 후 국가가 준 돈으로 서부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이들이었다.
그들 역시도 과거에는 북부의 입장에서 보호무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경제적입장이 달라진 후 그들은 자유무역을 지지했다.
<US Populism의 등장>
그 후 등장한 것이 US 포퓰리즘이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오즈의 마법사로 다시 돌아와서, 캔자스 출신의 도로시는 허수아비(농민)을 초대한다.
그리고 양철맨(수공업, 대장장이)도 데려온다.
양철맨과 같은 사람들은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에서 대규모 생산품과 경쟁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겁쟁이 사자까지를 모아서 단합한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시티로 간다. 바로 뉴욕이다. 뉴욕 시민들과 대립하겠다는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미국의 국내적 고통을 알 수 있다.
먼저,
오즈의 마법사의 배경은 남북전쟁 이후 25년-30년 이후로 미국이 발전을 그럭저럭 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전적 금본위제 하에서는
무역수지가 적자가 나면 국내경제의 디플레이션이 생긴다.
반대로 무역수지 흑자에서는 국내경제 인플레이션이 생긴다.
따라서 고전적 금본위제 하에서는 국내경제 자체의 변동성이 컸다.
미국에는 그러나 굳이 이러한 변동을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었으며
경제 개입을 통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조차도 없었다.
영국의 중앙은행이 1694년에 설립된데 비해 1913년에서야 미국의 중앙은행이 만들어졌었고, 그 둘은 무려 200년간의 내공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미국의 경기를 조정할 수 있는 수단이 도로시의 때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은 금본위제에 참여해 유럽의 경제와 연결되어, 도시의 이익을 위해서,
곧 에메랄드 시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 피해를 본 것은 바로 서부 사람들, 농민들이었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속에서 자기가 파는 농산물 등등의 가격이 변하며 손에 쥐어지는 돈이 적고, 또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주기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그들은 금본위제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찾았다.
금이 아닌 은으로 바뀐다면, 은 구두를 신고 에메랄드 시티를 장악한다면, 금이라는 국내경제와 세계경제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금과 은의 상징성이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한 불만은 1896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폭발한다.
민주당의 복본위제(금과 은을 모두!)를 주장한 후보는 비록 낙선했지만,
황금 십자가에 미국인들을 못박지 말라는 1896년 대통령 선거 연설은 미국 정치사에서 매우 훌륭한 연설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당대 미국에서는 서부쪽에 흩어져 있는 이들을 규합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었고,
바로 US populism을 나타낸다.
2. 독일 (4번 상황 계급 갈등)
비스마르크 통일 이전 독일 (1871) 유럽 국가였기 때문에 노동은 풍부했으나 자본과 토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독일은 그렇기에 4번 상황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때의 cleavage는 노동에 맞서 자본/지주가 대립하는 형태로 전형적인 계급 갈등(Class Conflict)이다.
따라서 정치적 갈등은 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통일 전에는 프로이센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농업 위주였기 때문에 자유무역이 잘 유지되었고, 농민들이 자유무역의 혜택을 누렸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자본이 풍부한 '프로이센 중심'의 관세동맹과 보호무역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노동자와 농민을 규합하는 것보다 자본가와 지주를 규합하는 대신 (호밀과 철의 연합)
농민과 노동자에게는 다른 보상을 해주는 방향을 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채찍과 당근 요법을 썼다.
1. 보호무역 (채찍)
2. 사회주의 금지법 실시 (채찍)
3. 사실상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다. (당근)
연금, 보험, 실업수당 등의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비스마르크 통치 하에 등장했다.
경제적은 불안감과 불안정성을 사회복지수단으로 해결해주는 것이다.
독일의 지주와 자본가계급의 결속을 '호밀과 철의 연합'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호밀과 철의 연합' 하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외관계 측면에서의 갈등이었다.
이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문제가 많았다는 것만 생각해두기3. 아르헨티나 (3번 상황 도농 갈등)
아르헨티나는 3번이었다. 땅 넓고 사람이 없었다.
아르헨티나에는 애초부터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확장은 주로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땅이 넓고 사람이 없으니까 목축업, 농업에 특화했고 생산물들을 유럽까지 운송하기 위해 때문에 운송업이 발달했다.
이미 185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이미 철도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농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하고, 지주가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이 지주와 마찰을 빚는다.
아르헨티나의 지주들은 농업을 위해 이민에 수용적이었다.
이는 당연히 도농 갈등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그럼에도 한동안 지주 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1895년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이민자로 채워지고 해외 투자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모든 것을 농업과 축산업에 집중시킨다.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가 있게 된 성장 방법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다.
독일 잠수함이 나타나서 영국의 식량공급을 막기 위해 영국으로 들어가는 모든 아르헨티나발 수송선을 격침시킨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비료를 팔던 공장들은 하나 둘 화약을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수출도 안되고 수입도 안 되고 갑자기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4년동안 모든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내면서 성장한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은 한마음 한 뜻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계급의 상대적 힘이 달라진 것이다.
그 갈등이 아르헨티나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걍 강의 들으면서 그대로 타이핑한 거라 좀 더러운 느낌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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